DATE | 2022/04/07 | GENRE | 멜로, 드라마, 퀴어 |
RATING | ★5.0 | DIRECTOR | 임대형 |
ACTOR | 김희애, 나카무라 유코, 김소혜, 성유빈 외 |
너는 내가 부끄럽지 않다고 했지?
나도 더 이상 내가 부끄럽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래, 우리는 잘못한 게 없으니까.
★★★
사무칠수록 담담하게
- 박평식 (씨네21)
★★★★
‘상실의 시대’를 애도하며, 여전히 ‘사랑을 믿다’
- 김소미 (씨네21)
'사무칠수록 담담하게'라는 박평식 평론가의 한 줄이 엔딩 크레딧 다음 마침표를 찍어줬다. 사무칠수록 담담하게, 〈윤희에게〉를 이보다 잘 담은 문구가 있을까? 〈윤희에게〉는 지금까지 봐온 퀴어 영화들과는 다소 결이 달랐다. 이 영화에서는 불꽃이 튀지 않는다. 불같은 사랑과 애타는 이별의 이미지 같은 건 없다. 영화가 그리는 것은 윤희와 쥰이 헤어진, 적어도 관계의 의미에서는 사랑이 끝난 시절로부터 20년 후. 하다 못해 그리움마저도 비현실적으로 뜨겁지 않다. 영화는 현실을 내던지고 채 식지 않은 감정에 뛰어드는 드라마틱한 사랑의 진행 과정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 대신 끝없이 눈이 내린다. 치워도 치워도 계속해서 그 자리를 메꾸는 눈. 매년 겨울이 되면 질리도록 내리는 눈.
'눈이 언제쯤 그치려나' 하는 대사를 읊는 인물들 역시 눈이 하루아침에 그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안다. 눈을 그치게 할 수 없다는 것 또한 알고 있다. 〈윤희에게〉 속 두 사람의 사랑은 정말 눈과 같다. 그치게 할 수 없는 자연현상과도 같은 오랜 감정. 사무치는 감정을 품고 참 담담하게 내리는데, 그것이 돌아가는 길을 막아버리는 폭설 따위가 아니라 그저 겨울에 소복하게 내려 세상을 희게 뒤덮는 정도다. 둘의 재회는 사실 영화 전체를 놓고 본다면 허무할 정도로 짧다. 하지만 관객은 불꽃 튀는 장면 없이도 영화 내내 두 사람의 삶에 녹아든 서로를 향한 사랑을 보고 듣는다. 쥰의 편지, 그리고 오타루에서 윤희가 흘린 눈물 등으로.
이 영화가 만약 불꽃을 이야기하고 싶었다면 당장 곁에 짝이 없는 쥰과 윤희의 상황은 다시 사랑을 시작하기에 너무도 적절한 타이밍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윤희에게〉 속 두 사람은 다시 연인이 되지 않는다. 그 대신 비로소 사랑할 수 있게 된다. 늘 주변을 외롭게 했고 그 자신은 더욱더 외로웠던, 나 자신을 사랑할 수 없어 누군가를 사랑할 수 없던 윤희는 비로소 겨울을 지나 '새봄'을 맞이하고, 아버지를 잃고 첫사랑의 아픔으로 자신에게 다가오는 사랑을 밀어내야만 했던 쥰은 고모와 함께 새 삶을 시작한다. 두 사람의 첫사랑은 둘을 외로움에 묶어두는 상처로 남지 않을 것이다. "그래, 우리는 잘못한 게 없으니까."
'윤희에게'로 시작되는 편지는 결국 화자의 독백이다. 그것이 닿았는지, 닿지 않았는지는 답장이 오기 전까지 알 수 없다. 하지만 그 편지에 '나도 네 꿈을 꿔'라는 답변을 써내릴 수 있게 되기까지, 영화는 우리에게 쓸쓸하게 비어있던 공간이 채워지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니 이 사랑을 이루어지지 않는 첫사랑이라고 부르고 싶지는 않다. '그렇게 충만했던 시절은 또 오지 못할 거고', '그때 헤어지자고 했던 내 말은 진심이었지만', '우린 잘못한 게 없으니까'. 그래서 〈윤희에게〉는 쓸쓸하고 비어있는 동시에 느리게 채워가는 영화라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