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키라 Akira, 1988

 

DATE 2022/03/10 GENRE 애니메이션, SF, 액션
RATING ★4.0 DIRECTOR 오오토모 카츠히로
ACTOR 이와타 미츠오, 사사키 노조무, 코야마 마미 외

 

 


 

인간은 평생 여러 가지를 하잖아. 뭔가를 발견하거나 혹은 집이나 다리처럼 뭔가를 만들거나.

그런데 만약 어떤 착오로 순서가 바뀌어서 아메바 같은 것이 인간과 같은 힘을 갖는다면?

아메바는 집이나 다리를 만들지 못해. 그저 자기 주변의 먹이를 먹어치울 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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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 에메랄드

 

〈아키라〉를 보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놉〉에 등장한 오마주 장면 때문이다. 이 오토바이 장면이 아키라의 오마주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오마주 된 장면을 보고서 '아…!' 하는 경험은 처음이었다. 미뤄두었던 궁금증을 끄집어내 영화모임 리스트에 올렸다. 그때까지도 아키라에 대한 배경 지식은 오로지 저 오토바이 장면 하나. 아키라는 주인공의 이름이겠거니, 시놉시스는 고사하고 장르도 몰랐다.

그래서 시작하자마자 당황했다. 제3차 세계대전? 네오 도쿄? 되게 매트릭스(맞았음. 아키라 영향받음.)나 공각기동대(맞았음.) 생각난다. 알리타:배틀 엔젤도 생각나고(맞았음. 아키라-공각기동대랑 일본 3대 사이버펑크 만화였음.) 에반게리온(맞았음.)도 생각나고… 당황한 것치곤 상당히 정확하게 본 셈이다. 막상 그 오토바이 장면은 초반부에 짧게 등장하고 지나간다. 구도나 연출이 멋있기는 하지만, 영화 전체를 따지고 본다면 그렇게 임팩트가 큰 장면도 아니다. 그러니까 〈아키라〉를 매드 맥스 류의 레이싱 스포츠 액션으로 생각하고 영화관에 입장한 건 승마 액션을 보겠다고 〈놉〉을 보는 것과 같은 셈이었다….

오히려 오마주가 된 부분들은 그 이후였다. 능력자의 폭주로 일대가 쑥대밭이 된 후 작품의 분위기가 포스트 아포칼립스로 바뀌는 연출이라거나, 염력의 발동으로 주변 사물이 파괴되는 연출이라거나, 나아가 테츠오는 베지터, 가아라 등의 모티브가 되었다고 한다. 깨닫지 못한 클리셰의 뿌리가 아키라에 있던 것이다. 88년 작품임에도 버블 경제의 예산과 인력을 쏟아부은 작화는 전혀 촌스럽지 않고, 찾아보니 작화를 그린 후 후시 녹음을 따는 게 아니라 음성에 영상을 맞추는 방식으로 작업을 했다고 하는데(미친) 그래서 입 모양도 딱딱 맞고, 실사화 영화를 한 편 보는 기분이다. 아키라가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이유에는 이런 작화가 지대한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 생각한다.

작품 내용에 대한 개인적인 감상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는 것이다. 절대 에너지인 아키라는 거대한 힘인 동시에 제어하지 못하는 재해다. 아키라 프로젝트의 성공작인 넘버즈들이 모두 어린아이인 것은 그들 스스로 무언가를 이끄는 존재가 아니라 정부의 어른들에 의해 힘으로 사용되는 수동적 존재임을 나타낸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 어린아이들이 작 중 인물들과 달리 책임감을 가지고 아키라의 부활을 저지하며 어른들조차 해내기 어려운 결단을 내려 카네다를 구한 것을 생각하면, 어른의 탐욕이 포함되지 않은 순수한 아이들이 아키라의 힘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었다는 이야기도 되지 싶다.

하지만 테츠오는 다르다. 테츠오는 결핍되어 있고 탐욕스러우며 카네다에 대한 강한 열등감을 지니고 있다. 이것을 가장 직관적으로 보여준 장면이 테츠오가 빨간 망토를 히어로처럼 두르는 장면이라고 생각하는데… (이 장면에서 탄식함) 그 장면에서 새삼 테츠오가 정말 어리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한 나이 이야기가 아니라, 손에 감당할 수 없는 힘을 쥐고 결국은 여러 의미로 그 힘에 잡아먹힌 미성숙하고 불완전한 아이를 보는 듯했다. 인크레더블 1편의 메인 빌런인 신드롬 생각도 났다. 이들은 히어로를 향한 열등감에서 시작되어 이후 능력을 얻자 뒤틀린 우월감과 영웅 심리에 도취한 채로 파괴를 일삼는다. 지금 생각하면 신드롬도 테츠오의 오마주일지도 모르겠다.

우월감은 열등감과 종이 한 장 차이다. 상대와 자신의 힘을 비교한다는 점에서 본질이 닮았다. 테츠오는 아키라에 필적하는 압도적으로 우월한 힘을 가지게 되나, 그 순간까지도 카네다에 대한 열등감에 잡아먹힌 채다. 그래서 〈아키라〉의 주인공은 테츠오가 아닌 카네다다. 〈아키라〉는 카네다의 영웅 서사가 아니다. 〈아키라〉하면 카네다의 빨간 수트와 오토바이가 떠오를 만큼 주인공의 이미지가 상징적임에도 막상 작 중 카네다의 지분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카네다는 테츠오같은 초능력을 가진 것도, 전쟁을 종식시키거나 테츠오의 폭주로부터 도쿄를 구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강한 신념과 친구인 테츠오에 대한 유대감, 책임감을 가지고 물러서지 않는다.

나는 〈아키라〉는 주인공이 없는 만화라고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카네다가 〈아키라〉의 주인공인 이유는 그에게는 적어도 자신의 삶의 주인공이 되는 힘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누구보다 강한 힘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책임질 수 있는 강한 사람이 되는 것.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끌어당기는, 비교하며 정체되는 것이 아니라 신념을 가지고 나아가는 것. 그게 누군가를 삶의 주인공으로 만들고, 그 욕심 없는 꼿꼿함은 거대하고 혼란스러운 세계 속에서 관객을 이끌어 나가는 축이 된다.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 어떤 책임은 그 무엇보다 강한 힘이 되기도 하니까.